한남대교는 사실 전쟁 때문에 개발 된 다리이다. 처음에는 관심이 아무도 없었다.
규모가 큰 이유는 북한보다 1미터라도 더 넓게 북한과의 경쟁 때문이다.
=> 그래서 지금의 교통량을 버틸 수 있었음
압구정동은 홍수만 나면 잠겨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홍수가 해결되고 폭등을 했다.
김형목은 주로 선릉을 중심으로 청담·삼성·대치동 땅을 3.3㎡(평)당 90~120원씩 40만평(※이하의 땅 규모는 당시 통용되던 평으로 표기했음) 구입했다. 주로 구(舊) 왕실 재산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땅투기를 했다는 말인가.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 1970년 초 그가 강남 일대 땅을 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박종규 청와대 비서실장 지시였다. 그때 24만평을 구입한 뒤 18만평을 다시 팔았다. 윤 국장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었다. 그렇게 20억원, 지금으로 치면 5000억원 넘는 돈을 마련했다.
=> 이는 이후 정치 자금으로 사용됨
“잠실 개발(위 사진)이다. 1972년 섬이었던 잠실을 쓰레기를 매립해 육지랑 연결하고 택지와 종합운동장 부지로 만들었다. 당시 건축부지를 최소면적 50평, 건폐율을 40%로 제한했다. 50평 가진 사람이 집 지을 때 집 면적이 20평이고 나머지 30평은 정원 만들거나 차고로 이용하게 한 거다. 오늘날 강남 건물이 다른 구에 비해 여유가 있는 데다 고급주택으로 채워진 건 이 덕분이다.
강남에는 처음에는 안오려고 해서 학교를 옮겼다. 반대가 심했다.
2호선은 즉흥적으로 개발되었다. 추진력은 좋았다 하지만 필자는 반대했다. 너무 빨리 만들었다. 그 결과 2호선이 강남고속터미널를 안거친다
-강남 개발로 돈 번 사람이 많다. 온갖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수백억원은 벌었을 것 같다.
“전혀. 늘 남보다 1년 정도 빨리 개발 정보를 알았다. 돈가방을 싸들고 와서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인 김형목이나 조봉구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 파산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701273#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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