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만주국에서 군사 및 행정 경험을 쌓은 박정희는 이러한 국가 주도 개발 체제의 작동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자, 이러한 방식은 한국의 산업화 전략으로 이어졌고,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보수가 이상화하는 과거 한국의 고도성장은 서구의 자유시장경제보다, 소련식 계획경제와 이를 기술적으로 흡수한 일제의 국가통제 시스템에서 비롯되었다.
민주 정부 아래서도 여전히 정부는 권위적인 태도로 시장에 개입했으며 생산과 소비 분배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와 관료 사회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경제성장을 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국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면서도 중앙 정부의 관료가 신축 아파트 분양가부터 수천가지 의료행위의 값을 정하고, 택시비도 정하고, 전기값도 정하고, 누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누구는 빌려주지 말지도 정해주고, 뭐 이것도 정해주고 저것도 정해주는 경제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계획경제는 실시간 수요·공급 변화가 시장가격에 반영되지 않아 자원 배분이 왜곡되며, 과잉생산이나 물자 부족이 반복된다. 이는 중앙에서 복잡한 경제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종시 어진동의 사무관들이 가격과 생산요소의 배분을 통제하는 방식은, 현장의 성과를 과장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이는 곧 생산성 저하와 보고 체계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결국 스탈린식 계획경제는 단기적 산업화에는 일정 부분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기술 혁신, 복잡한 자원 배분이 요구되는 현대 경제 체제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다수 경제학자들의 일관된 평가다.
이런 비효율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서울은 집이 부족해 집값이 폭등하는데도 공급은 이뤄지지 않고, 수요가 없는 지방엔 과잉 공급으로 건설사들이 파산한다. 필수 의료 분야의 공급은 줄고, 피부과는 넘쳐난다. 출퇴근 시간에 택시는 안 잡히는데, 기사들은 저임금에 시달린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 한전은 수십조의 적자를 내지만, 인스타 핫플 카페는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튼다. 부도 위험이 높은 소상공인 대출은 권장되면서도, 담보가 충분한 부동산 대출은 막힌다. 그 차이는 결국 재정으로 메워지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는 분야마다 자원과 자본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있으며, 이는 전반적인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구소련을 무너뜨린 계획경제의 비효율이, 그 정도만 다를 뿐 지금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계획경제의 비효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민간 경제 주체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지 않고, 관의 의중이 좌우한다면, 기업은 당연히 로비에 자원을 투입한다.
이제 많은 재벌 가문에게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되었고, 실제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전직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은 증가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보수 정권이 자본시장 정상화를 외쳤음에도 결국 상법 개정을 포기한 배경에는 이런 비대칭적 권력 구조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나라에 축적된 자본이 없던 초기에는 창업주가 곧 회사였다. 마치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의 관계처럼. 그런 시절에 정부와 재벌의 편의를 봐주던 것은 기업 활동에 다소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재벌 3세로 태어나 개차반으로 살다 아빠 돈으로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햄버거 브랜드나 가져오는 무능한 경영인을 정부가 싸고도는 것은 기업가치에 해를 끼치는 일이고 국내 자본시장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계획경제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정부가 민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스탈린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미하엘을 군수공장으로 내몰고, 도조 히데키가 자전거를 사고 싶었던 다카시에게 대신 전쟁 국채를 강매했듯, 한국 보수가 안전한 부동산 담보대출에 집중하려던 신한은행에 대신 위험한 큰 소상공인 대출을 늘리도록 강제하려면, 정부와 관료가 강력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명령을 거스르면 처벌할 힘을 가져야 한다. 계획경제는 늘 민간의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법, 더 복잡한 규제, 그리고 더 강력한 처벌을 들고나온다.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적 가치관은 민주주의적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기에 경제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갈등을 더욱 확산한다.
타협은 없다. 민간과 일일이 얘기하고 설득하면서 어떻게 중앙정부가 국가 경제를 “계획”하겠는가. 바빠 죽겠는데.
이는 단지 경제적 후퇴에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확산, 창의성의 발현까지 억제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활력을 잃게 만든다. 지난 보수 정부의 일련의 정책과 태도는 이러한 경고를 현실로 옮기고 있으며, 마치 구시대적 국가사회주의의 유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 위를 떠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과거 군 출신들이 민간으로 내려가 낙후된 군대 문화를 퍼뜨려 조직을 병들게 했듯, 관료 출신들 역시 어진동의 후진 관료 문화를 민간에 전이시켜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끊임없이 터진 인사 참사들은 다수가 이 구조적 병폐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처럼 한국 보수는 철학과 현실이 완전히 괴리된 집단으로 전락했다. 겉으로는 친미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미국과 정반대인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추진한다. 자본주의를 주창하지만, 자본시장 질서를 해치는 재벌들의 편을 든다.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반자유적인 정책을 도입하며 환호한다. 심지어 계엄령까지 시도했다. 반미 보수, 반자본 보수, 반자유 보수.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보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그들의 극단적인 언어를 빌려 “너희야말로 빨갱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들이 예고했던 대로 그들이 도입한 이 빨갱이식 시스템은 경제를 좌초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보수가 처한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 보수는 철학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성적이 바닥이던 학생을 두들겨 패서 대학에 보내는 스파르타식 교사의 방식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학생이 박사학위를 따고 세계적 연구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으려면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남 탓만 하며 어정쩡한 표정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한국 보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이런 구시대의 왜곡된 철학은 이제 퇴장할 때가 되었음을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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